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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블랙 프렌즈 K

‘녹기 전에’는 마포구 염리동에 자리한 아이스크림 가게입니다. 매일 메뉴가 달라지는 독특한 곳이죠. 바닐라, 초코부터 칡, 고추냉이(와사비), 게살까지. 지금까지 판매한 아이스크림이 종류로만 350여 가지라고요!

그런데 제가 ‘녹기 전에’의 팬이 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할 철학적 이유를 만들어 주는 곳이라고 할까요? ‘녹기 전에’ 인스타그램 계정에 가면 덥수룩한 수염의 박정수 대표가 우리를 맞이하죠.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되는 유머를 곁들여서요.

SNS를 볼수록 궁금해지더라고요. 대흥역에서 내려 골목 안쪽에 위치한 매장을 찾아갔어요. 박 대표를 만나서는 솔직하게 얘기했죠. 아이스크림은 핑계였고, 어떤 사람인가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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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녹기 전에 대표

‘녹기 전에’는 2017년 6월 종로구 익선동에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지금의 자리인 염리동으로 온 건 2020년이죠.

가게는 대로변이 아닌 골목에 있고, 크기도 5.5평으로 무척 좁아요. 하지만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아이스크림을 가득 담은 트레이는 하루에 30개씩 비워낸다고 해요. 한 달에 쓰는 우유량은 2톤에 달합니다.

비결을 묻자 박 대표는 뜻밖의 답을 내놓았습니다. 아이스크림은 굿즈로 팔고 있다고요. 아이스크림은 그가 세상에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적합한 도구라고요.

Chapter 1.아이스크림과 같은 인생, 녹기 전에 즐겨라

염리동의 ‘녹기 전에’ 매장에는 간판이 없습니다. 대신 큼지막한 아날로그 시계가 걸려있죠. 문패 자리에는 달력이 붙어있어요.

공통점을 눈치채셨나요? 맞아요. 모두 흘러가는 시간을 나타내는 물건이죠. ‘녹기 전에’에서 파는 아이스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보며,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박정수 대표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이유라고요.

“어릴 때부터 시간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과학 영화나 우주에 관한 콘텐츠를 많이 읽었거든요. 우주를 생각하면 아득하잖아요. 저 우주의 광활함 속에 우리는 먼지 같은 존재이기에 겸손해지고요.

그런 저에게, 아이스크림은 마치 종교와도 같았습니다. 어떤 경외심을 가질 정도였죠. 시계가 아닌 것들 중 시간의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매개체가 바로 아이스크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녹아버리니까요.

녹은 아이스크림은 풍미도 질감도 전혀 다르게 변합니다. 녹기 전 딱 그 상태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가 없죠. 그러니까 아이스크림에게도 생이 있다면, 아이스크림이 아이스크림으로 존재할 수 있는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 거예요.”

아이스크림에게 경외심까지 느낀다니. 과하다고 생각하나요? 박 대표는 아이스크림을 다양한 감각으로 탐구했기에 그렇습니다.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긁으면 입자들이 보이거든요. 저는 그 입자들이 참 아름답더라고요. 입자를 만져보기도 하고, 관찰했죠.

*오래 들여다보니 알겠어요. 아이스크림은 사실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을요. 과학적으로 보면 고체도, 액체도 아니에요. 콜로이드 상태라고 하죠. 이 상태를 유지해야 녹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 눈엔 보이지 않지만, 아이스크림은 지금 열심히 버티고 있는 거예요. 마치 사람처럼요.”***Colloid : 미립자가 기체 또는 액체 중에 분산된 상태.

아이스크림이 품은 철학적 메시지를 알리는 일. 박 대표는 소명의식을 느낄 정도였죠.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두산중공업에 입사했지만, 7개월 만에 퇴사했어요. 다음으로 들어간 현대자동차도 4개월 만에 사표를 냈죠. 아이스크림 가게가 하고 싶어서요.

“보통 살면서 ‘내가 언제 행복해야 되겠다.’ 인생에 점을 찍잖아요. 그 지점에 도달하려고 시간과 돈을 쓰고요. 10년 뒤 아파트를 사겠다고 한다면, 10년 뒤 그때 행복할 나를 위해 지금의 내가 일을 하고 돈을 모아요.

저는 죽을 때 행복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죽는 순간, 떠올릴 추억이 많아야겠더라고요. 직업을 다양하게 가지고, 여러 경험을 하며 살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박 대표는 2017년 2월 동대문의 한 젤라토 가게에 취업합니다. 도구의 사용법을 익히며 기본기를 다졌죠. 밤에는 아이스크림 만드는 연습을 했어요. 그리고 4개월 뒤, 익선동에 첫 가게를 오픈하죠. 이름은 ‘녹기 전에’. 현재를 충실히 살아내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